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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인성

무릎을 꿇는다는 것

by !)$@@!$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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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마음을 담아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자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은 지금까지도 아픈 상처의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호란까지 외침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청제국은 자신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며 조선 땅을 쳐들어왔습니다. 미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철퇴를 맞은 조선은 적을 감당할 능력이나 역량이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의리와 문화자존의식을 내세우며 항쟁을 주장했던 척화파 김상헌의 외침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습니다.

 

  처참한 상흔만 남긴 채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三拜九叩頭禮]를 행하고 맙니다. 무릎을 꿇고 항복을 선언한 파국의 역사는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적 단어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한 나라의 왕을 무릎 꿇게 한 오랑캐의 본의는 무엇이었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남보다 낮추는 것에 인색해서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는 것도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내가 남보다 많은 것을 지고 들어가는 듯 억울해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향한 굴복의 선언이며, 치욕의 시작이기에 보통 '굴욕'의 대명사처럼 인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치인들도 민의(民意)를 크게 거스르는 대죄(?)를 저질렀을 때 최종적인 행위로 국민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갑질 논란도 일단 상대방의 무릎을 꺾어놔야 희열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갖춘 사람들도 자신은 꼿꼿함을 유지한 채 상대방 무릎 꿇리기에만 더욱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대상을 불문하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최후의 보루인 자존심까지 꺾는다는 행위이니, 누군들 좋아할 리가 있을까요.

 

  조선 선비들의 무릎 꿇기는 이와는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항상 무릎을 꿇고 단정한 모습으로 앉는 것이 생활화되었는데, 이를 '염슬위좌(斂膝危坐)'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상대방에게 정중한 예의를 갖출 마음과 자세가 준비되어 있다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섬김'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나이와 지위로 상대방을 제압(?)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암시인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겸손의 무릎 꿇기는 수많은 고전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나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과의 눈높이를 동일하게 해서 예를 표한다는 뜻이니, 상대를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은 비언어적 표현인 것입니다.

 

  몇 년 전 대통령의 무릎 꿇기가 매스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싸인을 원하는 아이의 종이를 같이 찾아주고, 화동(花童)의 꽃다발을 받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며 무릎을 꿇은 모습이 낯설어서였을까요. 이외에도 상장을 수여하기 위해 어린 친구와 눈을 맞추는 교수님, 팬에게 무릎을 꿇고 싸인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무릎 꿇기의 다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정적 의미가 강했던 굴욕과 용서의 '꿇기'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담은 섬김의 '꿇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지도층의 무릎 꿇는 일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용서와 비굴함의 부정적 의미보다는 상대를 예로써 섬길 줄 아는 무릎이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도 이제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존경의 무릎으로 국민들을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들도 남의 무릎 꿇리기에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릎부터 꿇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남을 존중하는 마음이라야 사람이 되는 [尊人爲人] 것입니다. 상대를 높이고 섬길 줄 아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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