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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관인 언론의 역할

by !)$@@!$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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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사관

   조선왕조 오백 년의 정통성을 이끈 왕들은 모두 27명입니다. 이들이 죽으면 종묘에 신위를 모시는데, 이때 공덕을 칭송하는 차원에서 묘호(廟號)도 붙여 줍니다. ≪신당서≫에 '조유공, 종유덕(祖有功, 宗有德)'이라 하여 창업(創業)한 왕에게는 '조', 수성(守成)한 왕에게는 '종'을 붙인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의 왕은 조는 7명, 종은 18명에게 주어졌는데, 후기에는 종보다 조를 좀 더 높게 여겼기 때문에 정치적인 논리도 많이 작용했습니다. 여기서 제외된 2명의 왕이 바로 광해군과 연산군인데, 이들은 폐위되어 묘호를 받지 못하고 비운과 폭군의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중에서도 연산군은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에 의해서 쫓겨난 임금이기도 합니다.

 

   폭군으로 기억되는 연산군의 폭정은 역사의 기록에서 여실히 보여줍니다. 당시 대외 정세는 잠잠했을지 몰라도 국내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학정(虐政)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하들의 반정으로 강화도에 유배되어 숨을 거두기까지 지속된 10년 동안의 만행은 역사에 굵직한 오명(汚名)을 남겨 놓았습니다. 조선 최악의 왕으로 기억되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연산군이었지만,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입니다.

 

   사관은 모두 8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명씩 교대로 짝을 이루어서 왕을 24시간 밀착 동행합니다. 한 명은 오디오, 한 명은 비디오를 담당하여 왕의 대화와 표정까지 세밀하게 기록한 역사의 기록물이었기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횡을 휘두른 연산군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라면서 오직 역사의 기록 앞에서는 작아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사관은 군주의 지근거리에서 냉정한 이성으로 진실만을 기록하는 사명을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언론인으로서의 힘, 펜

 

■21세기 사관, 언론

   2011년에 서울시장 후보가 당선되고 나서 서울시 최초로 독특한 공약을 발표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 시정(市政)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서 '사관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장의 집무실에서 일어나는 각종 회의나 비공식 면담까지 담당 공무원이 모든 내용을 컴퓨터와 녹음기를 이용해 기록한다는 내용입니다. 투명한 시정으로 깨끗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취지라서 당시 많은 시민들에게 긍정적인 공감대를 일으켰습니다. 그만큼 위정자들의 역사는 진실돼야 한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론계에서 회자되는 말 중에 "곡필천주, 직필인주(曲筆天誅, 直筆人誅)"가 있습니다. 이는 "왜곡된 말은 하늘의 벌을 받고, 바른 말은 다른 사람의 해침을 받는다"라는 뜻입니다. 소신 있는 글을 쓰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지금 시대에 사관의 역할은 언론이 대신하기에 역사의 진실 앞에서는 떳떳해야만 한다는 소명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헛똑똑이(?)들을 비판하고, 눈으로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는 고압적 태도에 당당하게 맞서서 직필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불의를 정당화하고자 할 때에나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의 역사는 '정의의 기록'입니다. 만약 역사의 진실 앞에 최소한의 정의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관(邪官)들에 의해 국론이 양분되고 왜곡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자신의 길을 걷는 강필(强筆)의 사관(史官)들을 응원하며, 그렇게 또 역사의 한 페이지는 기록될 것입니다. 권력은 역사를 두려워하지만 정의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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