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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배움, 인생의 끝없는 여행

by !)$@@!$ 202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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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이유

   졸업 시즌인 2월이 되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스컴에 오르곤 합니다. 일흔을 넘긴 연세로 학교에 입학하는 어르신들의 소식이 보도되거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평생을 배움의 자세로 연필을 놓지 않고 만학도의 꿈을 이룬 사연들까지 다양합니다. 비록 늦게 시작했지만 그분들이 공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결과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학생들을 만나면서 변함없이 지켜오던 버릇(?)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시간 수업이 끝날 때마다 학생들과 문장 하나를 외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먼저 제가 "지지위지지"라고 선창을 하면, 학생들은 "부지위부지, 시지야"라고 후창을 하면 공식적으로 강의가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는 말입니다. 학생들이 이러해 주기를 바라는 바람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배움과 관련하여 인간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최상위는 성인과 같이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고, 둘째가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者)'입니다. 그다음이 '곤란한 다음에 배우는 사람(困而學之者)'이고, 마지막은 '곤란해도 배우지 않는 사람(困而不學者)'입니다. 이를 ≪중용≫에서는 '삼지(三知)'라 하여 성인, 현자, 범인의 순으로 정의를 내렸지만, 곤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인간의 최하위로 분류해 놓았던 것입니다.

 

학교로

 

■배워야 하는 이유

   배워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분야의 지식을 배워서 익히는 것을 우리는 학문(學問)이라고 하는데, '學'의 어원을 보면 '집()에서 아이(子)가 두 손(臼)으로 산가지(爻)를 들고 숫자를 배우는 모습'입니다. 혹자는 단지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 학문이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공부라고 의미를 나누기도 하지만, 공통점은 둘 다 '배운다'라는 것과 내 것으로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앎의 기쁨'을 누려봤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얻게 되는 카타르시스는 경험한 자만이 압니다. 중요한 것은 당연히 모를 수도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당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희열감'보다 몰랐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 더욱 크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것도 아는 척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자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하지만,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르는 것은 병도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숨기려 하는 마음이 병인 것입니다. 이는 주변의 비웃음이나 알량한 자존심이 무지에 솔직할 수 있는 용기를 억누르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전지(全知)한 인간인 양 '코스프레' 하도록 만들고 맙니다.

 

   이제 곧 신학기가 시작됩니다. 방학 때의 안이한 마음은 버리고 새로운 다짐으로 학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학문은 물이 흐르는 속성과 참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물은 웅덩이를 다 채운 뒤에야 나아가는 법이지, 절대로 빈 웅덩이를 건너뛰고 흐를 수는 없습니다. 맹자는 이를 '영과후진(盈科後進)'이라고 하였습니다. 학문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근차근 단계를 거치면서 내 것으로 만든 다음에 나아가야 합니다. 물이 웅덩이를 비우고 흐르지 않듯이 모르면 채워야 합니다. 채운 뒤에야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당당하게 알고자 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좀 더 솔직한 모습으로 '부지위부지' 할 줄 아는 '학이지지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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